우에시바 모리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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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883년 일본에서 태어나 합기도를 창시한 무술가이다. 그는 어린 시절 스모와 유술을 배우며 체력을 단련했고, 홋카이도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다이토류 아이키 주주츠를 익혔다. 이후 독자적인 정신 철학을 바탕으로 합기도를 창시하여, '화합'과 '만유애호'를 이념으로 삼았다. 우에시바는 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무술을 지도하며, 전후에는 합기도를 보급하여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렸다. 그는 1969년 사망했으며, 그의 무술은 단순한 격투 기술을 넘어 평화와 화합을 추구하는 철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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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시바 모리헤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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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우에시바 모리헤이 |
원어 이름 | 植芝 盛平 |
로마자 표기 | Ueshiba Morihei |
다른 이름 | 모리타카 우에시바 (植芝守高) 쓰네모리 (常盛) |
출생일 | 1883년 12월 14일 |
출생지 | 다나베, 와카야마, 일본 |
사망일 | 1969년 4월 26일 |
사망지 | 신주쿠, 도쿄, 일본 |
신장 | 156cm |
체중 (20세 때) | 75kg |
호 (칭호) | 카이소 (開祖) 오오센세이 (大先生/翁先生) 모리타카 (守高) 쓰네모리 (常盛) |
무도 정보 | |
무술 | 합기도 대동류 합기유술 |
스승 | 다케다 소카쿠 |
제자 | 합기도가 목록 참고 |
가족 | 이노우에 노리아키 (조카) 우에시바 모리테루 (손자) |
가족 정보 | |
자녀 | 우에시바 마쓰코 우에시바 다케모리 (유아 사망) 우에시바 구네하루 (유아 사망) 우에시바 깃쇼마루 |
수상 | |
훈장 | 정5위 훈3등서보장 훈4등욱일소수장 |
포상 | 자수포장 |
2. 생애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883년 12월 14일 일본 와카야마현 다나베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허약했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스모와 수영을 배웠고, 신토 신부였던 초등학교 교사 나스 타사부로의 영향을 받았다. 유교 교육보다는 진언종의 비전적 주문과 의례에 매료되었다. 다나베 고등 초등학교와 다나베 현립 중학교를 다녔지만, 10대 초반에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사립 주판 학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세무서에서 일하다 1901년 도쿄로 갔지만, 각기병으로 1년도 채 안 되어 다나베로 돌아와 이토카와 하츠와 결혼했다.
1903년 징집되어 러일 전쟁에 참전했고, 1907년 제대 후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미나카타 구마구스와 교류하며 신사 통합 정책 반대에 참여했고, 1911년 첫 딸 마츠코를 얻었다. 도쿄에서 기토류 유술을, 나카이 마사카츠에게서 고토하 야규류를 배웠고, 1908년 면허개전을 받았다. 1901년 토자와 토쿠사부로에게서 텐진 신요류 유술 지도를 받았다.
1912년 홋카이도 개척단의 일원으로 시라타키(현 엔가루정)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1915년 다이토류 아이키 주주츠의 창시자 다케다 소카쿠를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1917년 시라타키 대화재 후 복구에 힘썼고, 1918년 가미유베쓰 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9년 아버지의 위독 소식을 듣고 교토 근처 아야베에서 오모토교 지도자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만나 감화되었다. 1920년 가족과 아야베로 이주하여 오모토교에 귀의했고, 데구치의 요청으로 '우에시바 숙' 도장을 열었다. 다케다 소카쿠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다이토류 아이키주주츠'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지도했다. 사쿠라카이 회원 등 극우 인사들과 교류했다. 1921년 제1차 오모토 사건에도 도장은 무사했고, 데구치를 도와 오모토교 재건에 힘썼으며, 아들 킷쇼마루가 태어났다.
1924년 데구치와 함께 몽골로 갔다가 중국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일본 영사의 도움으로 귀환했다. 이후 영적 수행과 무술에 매진했고, 다케시타 이사무 제독의 초청으로 도쿄에서 무술 시범을 보였다.
1927년 도쿄로 영구 이주하여 미타, 다카나와 등지로 이사하다 1931년 신주쿠에 '황무관' 도장을 설립했다. 일본 해군 사관학교, 나카노 학교, 일본 육군 사관학교 등에서 가르쳤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만주국 건국 대학에서 활동했다. 1932년 딸 마츠코의 결혼과 이혼 후, 아들 킷쇼마루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1942년 이바라키현 이와마로 이주하여 아이키 슈렌 도장과 아이키 신사를 창설했다. 농업과 무술 수련을 병행하며, 1943년 스승 다케다 소카쿠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26]
1945년 종전 후 제자들이 이와마로 모여들었고, 우에시바 기쇼마루에 의해 본부 도장도 부흥했다. 1948년 '황무회'를 '재단법인 합기회'로 개칭하고 문부성 인가를 받아 '합기도'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했으며, 초대 합기도 도주가 되었다.[9] 1950년부터 전국 각지 도장을 방문하여 합기도를 지도했다. 1954년 시오다 고조가 일본 종합 무도 대회에서 우승하여 요신칸 합기도 도장을 창설했다. 1956년 최초의 일반 공개 연무회가 개최되었다.
1960년 다큐멘터리 영화 『합기도의 왕좌』가 제작되었고,[27] 자수포장을 수훈받았다.[27] 1961년 하와이에서 연무 지도를 했고, 다큐멘터리 영화 『합기도』가 제작되었다. 1964년 욱일소수장을 수훈받았다.[27] 1967년 합기회 본부 도장이 신축 완성되었다.
1969년 간암으로 사망했고, 정부로부터 서보장을 추증받았다.[27] 계명은 「합기원성무원융대도사」. 와카야마현 다나베시 명예 시민, 이바라키현 이와마정 명예 정민 칭호를 받았다. 우에시바 킷쇼마루가 2대 도주를 계승했고, 아내 하츠도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883년 ~ 1912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1883년 12월 14일 일본 와카야마현 다나베시 니시노타니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한 지주이자 소규모 정치인이었던 아버지 요로쿠와, 헤이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을 가진 유력한 지역 가문인 이토카와 가문 출신 어머니 유키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었다.어린 시절 우에시바는 허약하고 병약한 아이였으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스모와 수영을 배우도록 격려했고, 매우 강한 사무라이로 여겨졌던 그의 조부모 기치에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에시바의 초기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신토 신부였던 그의 초등학교 교사 나스 타사부로였다. 여섯 살 때 우에시바는 지조데루 사원에서 공부했지만, 유교 교육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학교 선생님 후지모토 미츠조는 진언종의 신부이기도 했고, 우에시바에게 이 종파의 비전적 주문과 의례적 관찰 중 일부를 가르쳤는데, 우에시바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우에시바는 다나베 고등 초등학교와 다나베 현립 중학교에 다녔지만, 10대 초반에 정규 교육을 그만두고 사립 주판 학원인 요시다 학원에 입학했다. 학원을 졸업한 후, 그는 몇 달 동안 지역 세무서에서 일했지만, 1901년 아버지의 지원을 받아 도쿄로 떠났다. 그곳에서 개업한 문구점인 우에시바 상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각기병을 앓은 후 1년도 채 안 되어 다나베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이토카와 하츠와 결혼했다.
1903년, 우에시바는 징집되어 오사카 제4사단 제37연대에 배속되었고, 이듬해에는 와카야마 제61연대 병장으로 진급했다. 러일 전쟁에서 최전선에서 복무한 후 그는 중사로 진급했다. 1907년에 제대했고, 아버지의 농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작가이자 철학자인 미나카타 구마구스와 친구가 되었고, 메이지 시대 일본 정부의 신사 통합 정책에 대한 반대에 참여하게 되었다. 1911년에 그의 아내와 첫 아이인 마츠코라는 딸을 낳았다.
도쿄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토바리 타키사부로 밑에서 기토류 유술을 공부했고, 잠시 신카게류를 가르치는 학교에 등록했다. 1903년에 시작하여 1908년까지 나카이 마사카츠 밑에서 고토하 야규류 수련을 했고, 1908년에 면허개전(전수 증명서)을 받았다. 1901년 그는 토자와 토쿠사부로로부터 텐진 신요류 유술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2. 2. 홋카이도 개척과 다케다 소카쿠와의 만남 (1912년 ~ 1919년)
1912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홋카이도 개척단의 일원으로 시라타키(현 엔가루정)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했다. 그는 85명의 개척자로 구성된 기슈 정착 그룹의 리더였고, 이 그룹은 같은 해 8월에 유베츠 마을(후에 시라타키 마을)을 설립했다. 이주 초기 3년 동안은 열악한 토양 조건과 악천후로 인해 작물 수확에 실패했지만, 민트 재배와 가축 사육에 성공했다.1915년, 우에시바는 엔가루의 히사다 여관에서 다이토류 아이키 주주츠의 창시자인 다케다 소카쿠를 만났다. 다케다의 무술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다케다에게 정식 지도를 요청하고 그의 유술을 진지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집 안에 도장을 짓고 다케다를 영구적인 손님으로 초대하기까지 했다.
1917년, 시라타키에서 발생한 대화재로 마을 전체가 불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우에시바는 주민들을 이끌고 복구에 힘썼다. 1918년, 그는 가미유베쓰 촌 의원으로 당선되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같은 해 여름, 그의 첫 아들 다케모리가 태어났다.
2. 3. 오모토교 입교와 아야베 시대 (1919년 ~ 1927년)
1919년 11월, 우에시바는 아버지 요로쿠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시라타키를 떠나 타나베로 향했다. 가는 길에 교토 근처 아야베에 들러 오모토교의 지도자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만났고, 그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었다.1903년, 징병 검사에서 키가 작아 불합격했지만, 꾸준한 노력과 당시 러일 간의 긴장 고조 등의 요인으로 그해 12월 재검에서 합격하여 육군에 입대했다. 1904년에는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에는 오장으로 승진, 제2군에 배속되어 전선에 나갔지만, 큰 전투는 없었다. 1906년에는 군조로 승진했고, 육군 토야마 학교 입학 권유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제대 후 타나베로 귀향했다.
1920년, 가족과 함께 아야베로 이주하여 오모토교에 본격적으로 귀의했다. 데구치 오니사부로는 우에시바에게 무술 지도를 요청했고, '우에시바 숙'이라는 도장이 세워졌다. 이 무렵, 둘째 아들 쿠니하루가 태어났으나, 타케모리와 함께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케다 소카쿠는 오모토교 신자가 아니었기에 데구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우에시바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다이토류 아이키주주츠'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지도했다. 그러나 데구치는 우에시바에게 자신의 무술을 발전시킬 것을 권유했고, 우에시바는 오모토교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
우에시바는 데구치와의 관계를 통해 사쿠라카이 회원 등 일본 극우 인사들과 교류했다. 이는 우에시바의 세계 평화에 대한 신념과 오모토교의 사상이 일본 천황 중심의 질서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921년, 대역죄 혐의로 데구치가 체포된 제1차 오모토 사건이 발생했지만, 우에시바의 도장은 무사했다. 우에시바는 데구치를 도와 오모토교 재건에 힘썼고, 같은 해 그의 아들 킷쇼마루가 태어났다.
1924년, 데구치는 징기스칸의 환생을 자처하며 몽골로 향했고, 우에시바도 동행했다. 그러나 이들은 퉁랴오에서 중국 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으나, 일본 영사의 도움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귀환했다. 이 사건을 '파인타라 사건'이라고 부른다. 우에시바는 이때 얻은 '왕서고(王守高)'라는 중국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우에시바는 영적 수행에 더욱 매진하며 무술 실력을 향상시켰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무술가들이 도전해 왔고, 다케시타 이사무 제독의 초청으로 도쿄에서 무술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야마모토 곤노효에는 우에시바에게 일본 황실 근위대를 지도할 것을 제안했지만, 우에시바는 데구치와의 관계를 우려한 정부 관료들의 반대로 아야베로 돌아갔다.
2. 4. 도쿄 진출과 합기도 창시 (1927년 ~ 1942년)
1927년, 우에시바는 가족과 함께 도쿄로 영구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무술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더 이상 한적한 지방의 무술가가 아니라, 정치인, 고위 군 관계자, 황실 구성원 등 일본의 주요 시민들의 스승이 되었다. 처음에는 미타, 다카나와 등지로 이사하다가, 1931년 신주쿠에 '황무관'(皇武館일본어)이라는 도장을 설립했다. 이곳은 훗날 아이키카이 혼부 도장이 되었다. 건설 기간 동안 우에시바는 근처 부동산을 임대했는데, 그곳을 유도의 창시자인 가노 지고로가 방문하기도 했다.
이 시기 우에시바는 군 고위층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여러 군사 연구소에서 가르치도록 초청받았다. 일본 해군 사관학교 무술 교관, 나카노 간첩 학교, 일본 육군 사관학교 객원 교관 등으로 활동했다. 1940년부터 1942년 사이에는 만주국 건국 대학에서 주요 무술 강사로 활동하며, 스모 선수 덴류 사부로를 제압하기도 했다.
1932년, 우에시바의 딸 마츠코는 검객 나카쿠라 기요시와 결혼했다가 몇 년 후 이혼했다. 나카쿠라는 우에시바의 후계자로 입양되었으나, 1937년에 가문을 떠났다. 이후 우에시바는 아들 킷쇼마루를 자신의 무술 후계자로 지명했다.
1930년대, 일본의 군사 활동이 증가하면서 우에시바는 전쟁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한 노력에 참여했는데, 1941년 고노에 후미마로의 요청으로 장제스와의 평화 회담을 위한 비밀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나 실패했다.
2. 5. 이와마 은거와 종전 (1942년 ~ 1945년)
1935년부터 이바라키현 이와마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40년대 초에는 약 17acre의 농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942년, 우에시바는 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 선동과 정치적 책략에 환멸을 느껴 도쿄를 떠나 이와마의 작은 농가로 이주했다. 그는 이와마에서 아이키 슈렌 도장과 아이키 신사를 창설했다. 그는 간사이 지방을 포함하여 일본 전역을 여행하며 자신의 아이키도를 가르쳤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무술 교육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에시바와 그의 제자들은 이와마 도장에서 은밀히 수련을 계속했다. 한편, 도쿄의 혼부 도장은 심각한 소이탄 공격으로 인해 이재민을 위한 피난 센터로 사용되고 있었다.이와마에서의 생활은 우에시바가 농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농업을 무술의 논리적인 보완으로 보았다. 두 분야 모두 육체적으로 힘들고 한결같은 헌신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의 농업 활동은 식량 부족이 만연했던 시대에 우에시바, 그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지역 가족들에게 식량을 제공했다.
1943년 5월 3일, 스승 다케다 소카쿠가 아오모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4세였다. 이 무렵 우에시바는 이와마에서 큰 병을 앓아 위독한 상태가 되었고, 소카쿠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26]
1945년, 종전이 되자 전지에서 복원한 제자들이 이와마의 우에시바에게 모여들었다. 이후 우에시바 기쇼마루에 의해 본부 도장도 부흥하면서, 도쿄와 이와마를 중심으로 전후 황무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2. 6. 전후 합기도 보급과 만년 (1945년 ~ 1969년)
1948년(쇼와 23년),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65세에 '황무회'를 '재단법인 합기회'로 개칭하고 문부성의 인가를 받았다. 이로써 '합기도'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초대 합기도 '도주'가 되었다.[9]1950년(쇼와 25년), 67세에 합기회 기관지 『합기회보』(후의 『합기도 신문』)가 발행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전국 각지의 도장을 방문하여 합기도를 지도했다.
1954년(쇼와 29년), 71세에 일본 종합 무도 대회에서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제자인 시오다 고조가 우승하여 '요신칸 합기도 도장'을 창설하고 합기도 보급에 나섰다. 합기회도 이에 자극을 받아 대학교, 관청, 기업 등에 클럽을 설립하고, 합기회 본부를 이와마에서 도쿄로 옮겨 본격적으로 합기도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1956년(쇼와 31년), 73세에 다카시마야 도쿄점 (니혼바시점) 옥상에서 우에시바 기쇼마루의 기획으로 합기도 최초의 일반 공개 연무회가 개최되었다.
1960년(쇼와 35년), 77세에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다큐멘터리 영화 『합기도의 왕좌』가 NTV에 의해 제작되었다. 5월 14일 도쿄 요요기야마노 홀에서 합기회 주최 「제1회 합기도 연무 대회」가 열려 1600명의 관중을 모았다.[27] 11월 3일에는 자수포장을 수훈받았다.
1961년(쇼와 36년), 78세에 하와이 합기회의 초청으로 하와이를 방문하여 각지에서 연무 지도를 했다. 11월 1일, 황거 원유회에 초대되어 출석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합기도』가 제작되었다.
1962년(쇼와 37년), 79세에 우에시바 모리헤이 감수, 우에시바 기쇼마루 저의 최초의 일반용 기술서 『합기도』가 출판되었다.
1964년(쇼와 39년), 81세에 "합기도 창시의 공적"으로 훈4등욱일소수장을 수훈받았다.
1966년(쇼와 41년), 83세에 브라질의 아포스톨리카 정교회 총대주교로부터 최고 명예 칭호 「백작」위를 받았다.
1967년(쇼와 42년), 84세에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합기회 2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12월 15일에는 근대적인 철골 3층 건물인 합기회 본부 도장이 신축 완성되었다.
1969년(쇼와 44년), 86세에 4월 26일 오전 5시, 간암으로 인해 도쿄 본부 도장 부지 내 자택에서 사망했다. 같은 날, 생전의 "합기도의 창시·및 보급의 공적"에 의해 정부로부터 정5위훈3등서보장을 추증받았다. 계명은 「합기원성무원융대도사」. 와카야마현 다나베시 명예 시민, 이바라키현 이와마정 명예 정민의 칭호를 받았다. 6월 14일에 우에시바 기쇼마루가 2대 도주를 계승했다. 6월 26일에는 아내 하츠도 병으로 인해 뒤를 따르듯이 사망했다(87세).
3. 합기도의 발전
합기도는 다이토류 합기유술을 기반으로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창시한 무술이다. 초기에는 '아이키주주츠', '우에시바류', '아사히류', '아이키 부도'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으나, 1942년 다이 니폰 부토쿠카이(대일본무덕회)에 합류하면서 '합기도'로 명칭이 통일되었다.
합기도 기술은 다케다 소가쿠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으며, 기본 기술은 다이토류에서 비롯되었다. 우에시바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다이토류 아이키주주츠를 가르쳤으며, 초기 제자들의 문서에는 다이토류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우에시바는 무술 수련과정에서 세 가지 영적인 경험을 했다.
- 1925년, 해군 장교의 보켄(나무 일본도) 공격을 맨손으로 제압한 후, "무도(武道)의 근원은 신의 사랑, 즉 모든 존재에 대한 사랑의 보호 정신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 1940년, ''미소기'' 수행 중 "내가 배운 모든 무술 기술을 갑자기 잊어버렸다. ... 이제 그들은 사람을 던지는 장치가 아니라 삶, 지식, 덕을 함양하는 수단이었다."라는 경험을 했다.
- 1942년, "평화의 대영혼"에 대한 환상을 보았고, "진정한 전사의 길은 ... 평화의 예술, 사랑의 힘이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에시바는 점차 다케다와 멀어지고, 자신의 무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기술보다 기의 제어를 중시하고, '만유애호'와 '화합'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무술은 부드럽고 온화하게 변화했으며, "호흡 던지기"와 같이 상대방의 움직임을 이용하는 기술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합기도 연구를 영적 훈련의 일부로 간주했다.
1919년(다이쇼 8년) 우에시바는 오오모토의 교조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11] 1920년(다이쇼 9년) 오오모토에 입교하여 오니사부로의 권유로 '우에시바 숙' 도장을 열었다. 1922년(다이쇼 11년)에는 오니사부로의 명명에 따라 자신의 무술을 "합기무술"이라 칭하고, "고토다마" 연구에 몰두하며 "무농일여"의 생활을 실천했다.[12]
우에시바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이들은 각자의 합기도 스타일을 개발하여 전 세계에 합기도를 보급하는 데 기여했다.
3. 1. 주요 제자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독자적인 합기도 유파를 창시하여 합기도 발전에 기여했다. 주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32][33][34]전전 (1921년 – 1945년) | 전후 (1946년 – 1960년) | 만년 (1961년 – 196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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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다 고조의 저서에 따르면,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고전적인 달인처럼 한 번 형을 보여준 후 같은 형을 반복해서 가르치지 않았고, 제자가 시범을 보여도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며 현대 무도처럼 세세하게 가르치거나 기술 체계를 상세하게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었다고 한다. 제자가 메모를 하는 것에 화를 내며 "왜 가르쳐주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가르쳐주면 형에 갇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얼버무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상당히 강해질 수 있었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은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시오다는 이러한 방식의 문제점을 인식하여, 누구나 쉽게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난해한 언어를 피하고 이해하기 쉬운 기술 체계를 가르치는 데 힘썼다.
4. 일화
- 1939년 봄, 만주국의 신징에서 열린 무술 시합에서 전 스모 세키와케였던 천룡이 힘겨루기를 신청해오자 그를 던져 넘어뜨렸다. 당시 천룡은 34세로 키 187cm, 몸무게 116kg이었고, 모리헤이는 55세로 키 156cm, 몸무게 75kg이었다. 이 사건으로 천룡은 모리헤이의 제자가 되어 평생 교류하게 되었다.그러자 선생님은, "당신은 천룡 씨가 아니십니까, 당신도 아마, 이 노인이 이렇게 능숙하게 던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무도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왼손이 약하기 때문에 왼손을 내밀며, "당신은 힘도 세겠지요. 힘도 아무것도 넣지 않았으니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해보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노인 뭘 말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손을 잡았지만, 순간 아찔했습니다. 마치 쇠몽둥이를 잡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저희는 스모계에 있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이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그것으로 진 겁니다. 하지만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어서, 어쨌든 비틀어 올려보려고, 꽉 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양손을 사용하여 힘껏 하려고 했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쾅하고 사용해서 뒤집혔습니다.(중략) 이런 무도가 있다는 것에 정말 놀랐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의 숙소를 방문하여, "부디 제자로 삼아주세요"라고 부탁했더니, 우시고메 와카마쓰쵸의 도장(황무관 도장)으로 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1』천룡 사부로 인터뷰, 228-229쪽일본어[30]
- 1941년경, 육군 헌병 학교에서 모리헤이에게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을 때, 실력을 겨루려는 도전이나 집단 매복 습격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이를 제압하였다. 모리헤이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어느 날 저녁, 훈련장을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뭔가 주위가 이상하다. 아하, 이건 뭔가 있겠군...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 풀밭이나 웅덩이에서 와 하고 30명 정도가 뛰쳐나왔다. 빙 둘러 나를 에워싸고, 손에 손에 목검이나 목총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런데 이쪽은 기습에 이미 옛날부터 익숙해져 있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사방에서 덮쳐오는 것을 힐끗힐끗 몸을 피하고, 톡톡 찔러주자, 재미있게 굴러떨어진다. 목검이나 목총은 꽤 무거워서, 함부로 휘두르면 그만큼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은 당연하다.(중략) 불과 5, 6분 만에 모두 숨이 차서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우에시바 모리헤이전』240-241쪽。일본어 이 습격의 주모자는 아라카와 히로시의 친척이었다.더 자신감을 얻었던 것은, 우리 아내의 사촌이 헌병대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중략) 그는 부하들에게 우에시바 선생님을 암살하도록 시켰던 것 같다. 그런데 부하들은 모두 당했던 것 같다. '너, 합기도 하고 있구나. 아, 저 노인은 강해, 진짜야', 그렇게 말했어. | 아라카와 히로시 인터뷰 『계간 합기 뉴스 NO.142』32쪽일본어
- 모리헤이는 여성과 아이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훈련에서 여성을 함부로 대하는 듯한 장면을 보면 격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여자 아이와 훈련하고 있을 때, "너는 낙법만 해! 여자 아이는 소중히 해야 해"라고 (웃음). 한 시간 낙법을 했습니다.|와타나베 노부유키(모리헤이 문인), 『개조의 옆모습』 164쪽일본어[31]
- 남자가 초단을 인가받지 않으면 하카마 착용을 허락하지 않는 데 반해, 여자는 초단 전・입문 시부터 하카마 착용이 허락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훈련 중 낙법을 취해 도복이 들춰져 속옷이 보이는 것을 가리기 위한 모리헤이의 배려였다.[31]
- 1934년경, 무도 전문 학교의 유도가 아베 겐시로와 기차 안에서 만났을 때, 모리헤이는 아베에게 새끼손가락을 잡게 한 뒤, 순식간에 아베를 그 자리에서 제압해 보였다. 아베는 이에 감동하여 이후 모리헤이를 따라 10년간 합기도를 배웠다. 저는 아베에 대해 조사하는 가운데, 불가사의한 곳에 도달했다. 영국의 합기도이다. 아베는 쇼와 31년(1956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재영 합기도가 헨리 엘리스가 가르쳐 주었다.
"영국에서는, 아베 선생님은 매우 뛰어난 유도가로서, 또한, 처음으로 합기도를 들여온 무도가로서 유명합니다"
그러나, 아베가 합기도를 했다는 일본의 사료는 없다.
"아베 선생님은 교토의 무전을 나온 유도의 전문가입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합기도를 배우신 건가요?"
의문을 던지자, 엘리스는 수십 년 전 그 경위를 아베에게 직접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아베는 서투른 영어로 엘리스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베가 20세 전후로, 무전의 학생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유도의 시합을 위해 야간 열차를 타고 있던 아베의 맞은편 자리에, 수염을 기른 노인이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노인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유도의 챔피언이니 아시겠죠"
아베는 깍듯이 대답하고, 예의로서 노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당신의 이름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우에시바 모리헤이다"
아베는 우에시바의 이름을 몰랐기에, 흥미를 느끼지 않고, "피곤해서 잠시 자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우에시바가 아베의 얼굴에 새끼손가락을 찔렀다.
"이 새끼손가락을 꺾어 보세요"
아베는 그 무례함에 짜증이 나서, 우에시바를 묵묵하게 하려고 있는 힘껏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그 순간, 아베는 차량의 바닥에 제압당했다. 아베는 그 자리에서 우에시바에게 제자가 되어, 10년간 합기도를 배우게 된다.(중략)
엘리스는 "아베 선생님은 매우 겸손하신 분입니다. 스스로 이런 이야기를 하거나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의문이 든 제가 물어본 겁니다"라고 말하니, 각색 없는 진실일 것이다. 아베는 유도가로서의 수행을 계속하면서, 우에시바에게 합기도도 배운 것이다.
아베의 유도에는 합기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피가, 기무라로 하여금 "마치 솜에 기술을 건 듯이 부드럽게 받아들여져, 전혀 효과가 없다. 거는 기술 거는 기술 모두 같은 조화로 받아들여져 버린다"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마스다 토시야, 『기무라 마사히코는 왜 리키도산을 죽이지 않았는가』(「공 격투기」、2008년 6월호)일본어
- 뉴욕에서 프로 복싱단이 방일했을 때, 망간이라는 단장이 다케시타 이사무의 안내로 우에시바 도장을 방문하여 훈련을 견학하고 야라세라고 말하며, 모리헤이에게 시합을 신청했다. 모리헤이는 거절했지만 상대가 물러서지 않아, 맞붙게 되었다. 6척 8촌, 30관의 거한인 망간이 모리헤이의 가슴에 날아차기를 했지만, 모리헤이가 몸을 피하고, 망간은 머리부터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17]
5. 평가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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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서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생전에 여러 권의 저서를 남겼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무도 연습』(1933), 『무도』(1938) 등이 있다.[37][39] 그의 저서들은 합기도의 기술과 철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무도 연습'''』 (1933년): "우에시바 모리타카" 명의로 쓰여진 모리헤이 최초의 저서. 갈리판 인쇄로 관계자에게만 배포된 사비판이다. 제자인 고시코 타카코의 삽화에 의한 기술 해설서로, 고제자 토키 켄지가 정리 편집했다.[37] 영문판으로는 래리 E. 비에리, 세이코 마부치 역의 ''Budo Training in Aikido''(미나토 리서치(스가와라 종합 무도 연구소), ISBN 4889960791)가 있다.[38]
- 『'''무도'''』 (1938년): "우에시바 모리타카" 명의로 쓰여진 기술서. 수백 부만 자비 출판되어 관계자에게 배포되었다. 세로 26.7cm, 가로 18cm, 총 50쪽에 119장의 모리헤이 연무 사진(받는 사람은 우에시바 기쇼마루, 시오다 고조, 외 1명[39])에 의한 50개의 기술(준비 동작, 체술의 기본 기술, 단도 잡기, 태도 잡기, 검 대 검, 총검술, 종말 동작)이 게재되어 있으며, 모리헤이의 해설문이 붙어 있다. 이 책은 당시 모리헤이가 개인 지도를 하고 있던 카야노미야 쓰네노리(황족·육군 중장)를 위해 텍스트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40] 영문판으로는 JOHN STEVENS 역의 ''Budo: Teachings of the Founder of Aikido''(고단샤 인터내셔널, 1996년, ISBN 4770020708)가 있다.
- 다카하시 히데오 편저, 『'''무산 합기 - 우에시바 모리헤이 선생 구술'''』 (백광진굉회 출판국, 1986년, ISBN 4892140805)
- 우에시바 키쇼마루 감수, 『'''합기 신수 - 합기도 개조 우에시바 모리헤이 어록'''』 (하치만 서점, 2002년, ISBN 4893503820)
- 합기 뉴스 편집부 편, 『'''결정판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1 - 개조를 말하는 직제자들'''』 (도출판, 2006년, ISBN 4900586811): 라디오 인터뷰 「아름다운 이 천지의 모습은 주가 만드신 한 집안이라」 (1965년) 수록.
- 합기 뉴스 편집부 편, 『'''결정판 우에시바 모리헤이와 합기도 2 - 개조를 말하는 직제자들'''』 (도출판, 2006년, ISBN 4900586838): 인터뷰 「꽃의 전언대로 나는 태어났습니다」 (1969년), 「아름다운 이 천지의 모습은 주가 만드신 한 집안이라」 (1956년) 수록.
- 미우라 칸조 저, 『심령의 비약』 (닛토 쇼인, 1932년): 우에시바 모리타카 명의로, 검도(검도가)로 소개되어 있다. 어떤 종교에서 여러 해 동안 고심했지만 길을 찾지 못하고, 고신토(古神道)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되어 있으며, 당시에는 아직 합기도(合気道)라고 칭하지 않았다.
7. 기념 시설
다나베시에서는 1988년에 제5회 국제 합기도 대회를 기념하여 선가하마 공원에 모리헤이옹 현창상을 건립하였다.[35][36] 우에시바 가문의 묘소는 다나베시 이나리마치에 있는 고산사에 있다.[35][36] 다나베 시립 무도관은 노후화로 인해 재건축될 예정이며, 이와 함께 우에시바 모리헤이를 기리는 시설이 병설될 예정이다.[35]
모리헤이옹 생가 터는 카미노야마 2초메에 있으며, 우에시바 모리헤이 송덕비도 있다.[35][36]
모리헤이가 1912년부터 1919년까지 가족의 호적을 두고 이주했던 가미시라타키(上白滝) 지역에는 1983년 당시 시라타키 촌(홋카이도)이 '합기도 유서 깊은 곳 비'를 건립했다. 이후 엔가루정(遠軽町)이 석비 주변을 정비하고 안내 간판 등을 설치했다.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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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年(大正15年)から1941年(昭和16年)頃まで使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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猿田彦大神の御神示として、昭和二十八年一月二十一日に常盛と命名が下さ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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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界に広がる合気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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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合気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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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特集】世界遺産登録から3年 再発見、世界遺産「高野・熊野」
http://www.pref.waka[...]
和歌山県
2015-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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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術秘伝書夢世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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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陰流剣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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惣角との邂逅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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判事を教える有能な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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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口王仁三郎との出会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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綾部で惣角講習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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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霊界物語-入蒙記』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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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霊界物語-入蒙記』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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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仁三郎に「塩水を何杯飲めるか」という勝負を挑んできた「バラモン修行者」と自称する男に対し、盛平が身代わりとなってこれを競い、胃腸を傷めたのが原因とされる。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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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御所での指導は盛平と大本教の関わりを警戒する内務省 (日本)・検察から反対された経緯があり、憤慨した盛平は数日で綾部に帰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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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荘を廻る人々 合気道の開山植芝盛平(後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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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人の叫び
195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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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陰流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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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陰流兵法転会公式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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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生新陰流を学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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惣角大阪朝日新聞に来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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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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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藝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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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12年7月28日(水)海軍辞令公報 號外 第十一號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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鹿島新当流に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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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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惣角の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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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後毎年開催され、観客の増加に伴い日比谷公会堂を経て1972年(昭和47年)からは日本武道館で行わ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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田辺市HP | スポーツ振興課 | 合気道開祖・植芝盛平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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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益財団法人 合気会 | お知らせ | 開祖像建立実行委員会代表報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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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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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竜を投げ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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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性の初段前からの袴着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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植芝盛平#開祖の横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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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政彦はなぜ力道山を殺さなかったの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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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伝 中倉清烈剣譜
スキージャーナ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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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合気道開祖の顕彰施設建設へ 田辺市、新武道館に併設
http://www.agara.co.[...]
2017-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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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気道開祖・植芝盛平翁について
http://www.city.tana[...]
田辺市
2017-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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合気道教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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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財)合気会/合気道図書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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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一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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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武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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